원나라 과거에서 급제한 인재로 고려에서 성균관을 중건한 인물인 목은 이색은, 고려 말 1328년(충숙왕 15)에 출생하여 조선 초 1396년(태조 5)에 타계한 유학자이자 문신(文臣)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더불어 삼은(三隱)으로 불리며, 이색의 정치활동은 쇠약해진 원의 속박에서 탈피하려던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을 보필하던 때부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의 혼란기였다.
변혁의 시대를 가로질러 살면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인물로 충성과 지조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한시 6000수를 남기면서 시조로는 단 1수를 남겼다니, 최초의 시조를 남긴 역동 우탁선생과 흡사하다. 말과 소리로만 남긴 훈민정음 창제 이전 당시의 학풍여건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초장{백설(白雪)이 자자진 골/ 구름이 머흐레라.}을 풀이하면,
“흰 눈이 녹은 골(골짜기)에/ 구름이 (많이) 끼었구나.”로 주변을 둘러보고
중장{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퓌었는고?}에서 매화를 읊으니,
“반가운 매화(梅花)꽃은/ 어느 곳에 피었는가?”라고 관심을 모았다가
종장{석양(夕陽)에 호을노 셔서/ 갈 곳 몰라 하노라!}로 마감했는데,
“석양(夕陽)에 나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로 자신의 현실을 돌아보고 있다.
약 700년 전 시조 태동기(時調 胎動期)의 탄로가(歎老歌)나 매화가(梅花歌)를 거듭거듭 음미해 볼수록 우리 선조들은,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나 인생 말년의 취미, 자신의 결기(結己) 등 떠오르는 시상을 표출할 때 운율과 격식에 특별하게 역점 두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