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등과 집현전에서 선배 학자로 일한 하위지(河緯地)의 평소 생활 모습이 담긴 시조 한 수를 음미해 보고자 한다.
이 시조는 수양대군의 반역사건(김종서 처형 후 영의정 차지)에 충격 받아 자원사직하고 고향 선산으로 낙향 후 산골생활의 멋과 맛을 읊은 시조이다.
초장[객산(客散)- 문경(門扃)하고/ 풍미(風微)- 월락(月落)할 제,}에서 방문객들 떠난 뒤 사립문을 끌어 닫고/ 밤바람 스치며 달 넘어가는 때에, 중장{주옹(酒甕)을 다시 열고/ 싯구(詩句)를 흩뿌리니,}은 술 항아리를 다시 열고/ 시 한 수 펼쳐 뿌려 보니, 종장{아마도 산인득의(山人得意)는/ 이뿐인가 하노라!} 으로 맺는데, 곧 산속 사람 되어 누리는 뜻이야 이런 맛이라 하겠다!
어릴 때부터 두문불출 공부에만 몰두했던 형제 한학자인 정직 순진한 그는 한때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다가 세종성왕께 투옥 당하였다가, 바로 석방 복직하게 된다. (식년문과 장원급제한 26세 수재를 세종께서 무척 아끼셨던 터라.) 36세 춘추관 사관으로 ‘고려사’ 개찬에 참여하고, 단종 즉위 후 ‘세종실록’ 편찬에 참여한다,
세조 즉위 후 예조참판으로 강권 부임했지만, 세조가 주는 봉록(俸祿)은 방안에 쌓아두고 먹지 않았고, 세조의 ‘육조직계제(六曹直啟制)’를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단종복위 운동의 반역죄로 취조 받을 땐 세조 앞에서 “진짜 반역자 네 놈이 물어볼 자격이 뭐가 있다고 죄를 묻느냐?”라고 맞서자, 바로 거열형(車裂刑; 죄인의 목과 사지를 수레의 끈에 묶고 소나 말로 다섯 방향으로 당겨 몸을 찢어 죽이는 사형)을 당하고, 그의 아버지와 형과 두 동생 두 아들은 ‘씨를 말리는 삼대 멸문형’으로, 어머니와 여동생은 ‘노비 강등’되어 가문이 멸절되었다.
지극히 순진 유연한 분으로 불의를 보고 목숨 걸고 싸운 점이 우러러 보이며, 어떻게 무엇을 배웠는지, 어디서 저런 힘이 난 것인지 궁금하다.